ending
■ 태초의 불을 계승하는 자
"......"
귀인은 다섯 명의 장작의 왕의 장작을 모아 불태운 뒤 태초의 불을 계승했다. 그리고 왕들의 화신이 그랬듯이 귀인은 태초의 화톳불 앞에 홀로 가만히 앉았다.
그러나 화로의 불꽃은 크지 않았다. 오래전 어느 불사자가 태초의 화로를 화려하게 타오르게 했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잔불 자체도 약했거니와, 재의 귀인은 이미 한 번 타버린 재였기에 불씨는 조금 더 연명하다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미 세상은 종말이 가까워지다 못해 온갖 지각변동과 시간의 뒤틀림이 발생하고 있었다. 귀인의 처절했던 노력은 무의미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이제 불의 소멸은 피할 수 없었다. 이미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진 세상의 하늘에는 다크링 모양의 일식이 공허하게 떠 있었다.
■ 불의 계승의 끝
"태초의 불이 사그라들고 있습니다. 이제 곧 암흑이 찾아오겠지요."
귀인은 일전에 화방녀에게 눈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어둠에 대한 작은 귀띔을 받은 적이 있었다. 재의 귀인은 그때의 이야기를 기억하고는 화톳불 앞에 화방녀를 불러 꺼져가는 최초의 불꽃을 거두어 버렸다. 불의 시대를 끝내버린 것이다.
"언젠가 반드시 암흑 속에 작은 불꽃들이 나타날 겁니다. 왕들이 계승해온 잔불이..."
화방녀는 이제 곧 어둠이 찾아오겠지만, 언젠가는 다시 작은 불꽃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귀인 또한 화방녀가 말한 것이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을 믿고는 더는 이어나갈 수 없는 한 시대의 종극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잠시 후, 형언할 수 없는 무거운 어둠이 찾아왔다. 그야말로 어둠뿐인 세상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귀인의 귓가엔 화방녀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재의 귀인, 아직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 배신
"장작조차 되지 못한 저주받은 자... 하지만 그렇기에, 재는 잔불을 바라는 법."
재의 귀인은 시대의 끝을 인정하고 화방녀를 불러 불꽃을 거두게 하려 했다. 그러나 귀인은 막상 꺼져가는 불을 보자 잔불을 원하는 충동을 견디지 못했다. 귀인은 그 자리에서 화방녀를 죽이고 최초의 불꽃을 빼앗았다. 이때 화방녀는 죽어가면서도 불을 거두려 하지만, 재의 귀인은 화방녀의 머리를 짓밟고 죽어가는 그녀의 수중에서 최초의 불을 기어코 강탈한다. 그러나 그 배신의 행위의 끝은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 불의 찬탈자
"오오.. 우리들 망자의 왕이시여.. 론돌을 하나로 이끌어 주소서..."
귀인은 태초의 불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 뒤, 태초의 불이 가진 권능을 찬탈하여 직접 어둠(심연)의 시대를 열고 장작의 왕이 아닌, 세상을 지배하는 '망자의 왕'으로 등극했다.
불의 시대의 종극이라는 순리를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불을 이어받는 선택을 한 귀인은 인간에게 주어진 어둠이라는 본질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심연의 왕이 된다.
DLC
재의 귀인이 불의 계승식을 행하기 며칠 전, 귀인은 한 남자로부터 어떤 부탁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남자는 깊은 곳의 성당에 웅크리고 있던 노예기사 게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찾던 자가 귀인일 거라며, 차가운 나라에 있는 자신의 '아가씨'에게 불을 보여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귀인은 게일이 건넨 그림 조각에 손을 댔고, 그러자 어느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곳은 <아리안델의 회화 세계>라는 곳이었다. 게일이 원하는 것은 바로 그 회화 세계를 태워버릴 불꽃이었다.
잠시 회화세계에 가게 된 재의 귀인
아리안델의 회화세계는 버려진 자들이 모이는 안식처였다. 바깥에서 배척받은 까마귀 인간들, 숙적인 심연의 용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오랜 방황을 한 밀우드의 전사들, 심연과 싸우다 흩어진 팔란의 유귀들... 그러나 회화 세계 역시 멀쩡하지는 않았다. 그곳은 오래된 종이가 썩어가듯 부패해가고 있었다.
"차라리 태워버리고 새로 그려달라는 게 어때?"
천천히 썩어 문드러져 가는 세계가 더 고통스러웠던 회화세계의 주민들은 점차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다 태워버리고 새로 그리면 되지 않을까. 그들에게는 회화세계를 다시 그릴 수 있는 화가가 있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먼저 회화세계를 태울 불이 필요했다. 그들에겐 불이 없었다.
하얀 머릿결을 가진 화가 소녀
"...불을 모르는 자는, 세계를 그릴 수 없으며 불에 이끌리는 자는, 세계를 그릴 자격이 없다..."
오래전 화가의 어머니는 소녀에게 이런 조언을 남긴 적이 있었다. 소녀는 아직 불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회화세계에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오는 전승이었다.
「언젠가 두 개의 재가 와서 불을 일으킨다」
회화세계에선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한 전승이었다. 마침 첫 번째 재가 회화세계에 이미 머물고 있었다. 프리데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 다만 프리데는 화가와 생각이 달랐다. 프리데는 비록 회화세계가 썩어가더라도, 그 세계를 지키고 싶어 했다.
풀네임 엘프리데. 그녀 역시 불의 계승에 실패한 '불 꺼진 재'다.
프리데는 <론돌의 흑교회>의 세 딸 중 장녀였다. 그녀는 모종의 이유로 론돌에 등을 지고 자신의 기사 빌헬름 경과 함께 회화세계로 들어왔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온 프리데는 회화세계에 버려진 자들을 보고 동정을 느껴 그들, 더 나아가서는 회화세계 그 자체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회화세계의 수복자인 아리안델 신부는 본래 자신의 피로 화가가 새로운 세계를 그릴 수 있게 하려 했으나 프리데의 설득을 받아 반대로 이 부패한 세계를 지키고자 마음을 바꿨다.
이후 회화세계에서 수도녀의 역할을 자처한 프리데는 자신의 불을 숨기고 화가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도록 그녀를 화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감금했다. 그리고 자신의 기사 빌헬름으로 하여금 그 장소를 지키게 했다.
화가 소녀의 어머니가 에레미어스의 회화세계를 그린 화가라는 추측도 있다.
한편 재의 귀인은 게일이 이야기한 아가씨를 찾아 회화세계를 헤매다 어느 예배당에서 수도녀 프리데를 만난다. 프리데는 '이곳은 당신의 사명과 관계없는 곳이니 헤매다 잘못 들어온 것이라면 다시 돌아가 달라'고 요청했다. 다시 아가씨를 찾아 떠난 귀인은 까마귀 마을에서 전승대로 부패한 세계를 태울 두 개의 재를 기다리던 까마귀 인간과 만났고, 그로부터 프리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프리데가 아리안델 신부를 속였으며 세계가 불타는 것을 각오한 우리들의 의지도 뺏어갔다고 그녀를 비난했다.
재의 귀인은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러다 한 폐건물에서 무언가를 지키려 하는 기사와 싸우게 된다. 그는 프리데의 기사 빌헬름이었다. 귀인은 빌헬름을 쓰러뜨리고 그곳에 천장에 감금되어 있던 하얀 머리의 소녀를 구출했다. 바로 그 소녀가 게일이 말한 아가씨이자, 부패한 회화세계를 태우고 새로운 세계를 그릴 화가였다. 게일은 전승대로 두 개의 재 중 나머지 하나를 찾아 바깥 세계에서 재를 찾아왔고, 그러다 만난 것이 귀인이었던 것.
재의 귀인에 의해 구출된 화가는 예배당 다락방에 있는 자신의 화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귀인에게 새로운 세계를 그릴 수 있게 불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귀인은 우선 숨겨진 예배당 지하로 들어가 그곳에서 아리안델을 만났다. 아리안델 앞의 커다란 그릇엔 회화세계를 태울 수 있는 불씨가 있었다. 아리안델은 그 불씨를 자신의 피로 잠재우고 있었다.
신부님, 참 아름다우십니다.
그런데 전승대로 두 번째 재가 회화세계에 당도하자 불씨는 더욱 크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리안델은 그것을 잠재우기 위해 프리데에게 채찍을 가져와달라고 했다. 수복 행위를 통해 자신의 피를 더욱 많이 쏟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프리데는 불씨가 커진 것은 이곳에 헤매다 들어온 재(귀인)로 인한 것이니 자신이 그 자를 처리하겠다며 귀인과 맞붙었다.
귀인은 자신에게 덤벼드는 프리데를 주저 없이 살해했다. 차가운 예배당 지하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프리데를 본 아리안델은 크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릇 안에 있던 불씨를 해방해 그녀를 부활시킨다.
되살아난 프리데와 폭주하는 아리안델
귀인은 다시 한 번 그들을 쓰러뜨렸다. 프리데가 쓰러지자 전승대로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회화세계의 주민들은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국 두 개의 재가 오고 난 후에 불씨가 피어났음을 알게 되었고, 그에 만족했다.
화가 소녀는 조금 있으면 자신이 불을 볼 수 있을 거라며 귀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비로소 새로운 회화세계를 그릴 준비를 했다. 이제 안료만 있으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이때 그녀는 한 가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바깥 세계에서 안료를 구하고 있을 자신의 할아버지 게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는 발견하셨을까? 사람의 어두운 영혼을..."
그것은 '다크소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귀인을 회화세계로 보낸 이후 어두운 영혼을 찾고 있었던 게일
귀인은 게일을 만나기 위해 그가 있는 세계의 끝, 퇴적지로 향했다. 그곳은 불의 시대의 종말이 다가옴에 따라 모든 땅이 흘러들어와 쌓여 생성된 땅 끝의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잔해들이 모이는 가장 깊은 곳엔 신들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난쟁이들의 땅인 <고리의 도시>가 있었다.
세계의 땅 끝, 퇴적지
퇴적지에는 먼저 온 게일이 납석으로 새겨놓은 이정표들이 있었다. 귀인은 그 흔적을 따라 퇴적지 깊은 곳으로 낙하해 들어갔다. 종국에 최초의 계승의 제사장까지 닿은 귀인은 그곳에서 꺼져가는 혼돈의 불꽃을 소유하고 있던 두 마리의 데몬을 상대하게 된다.
그들은 혼돈의 못자리에서 태어난 데몬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그들은 못자리가 사라진 이후 폐허가 된 옛 로드란의 제사장에서 가까스로 연명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혼돈의 화염마저 태초의 불마냥 사그라들고 데몬 역시 멸종이 임박해지자 두 데몬은 힘을 합쳐 나름대로 혼돈의 화염을 피우려 했다. 실제로 그들은 귀인과 상대하면서 최후의 데몬이 '데몬의 왕자'로 각성함과 동시에 폐허 전역에 혼돈의 불을 피워냈다. 하지만 역시 귀인을 이길 순 없었다.
한편 귀인은 여정을 시작했을 때 퇴적지에서 만난 두 명의 인물에게 기묘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다. '라프'라는 세계 최후의 망자는 이 퇴적지 최심부에 있는 고리의 도시에서 망자의 저주를 풀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반대로 돌 뚜껑을 쓴 어느 노파는 고리의 도시는 '어두운 영혼'이 산재하는 곳이니 가지 말라고 충고했다. 어쨌든 귀인은 도시로 가야 했다. 마침 최초의 계승의 제사장에는 칙사의 깃발이 있었다. 귀인이 그것을 세우자 신에게 사역되던 데몬들이 찾아와 재의 귀인을 고리의 도시로 날라다 주었다.
퇴적지를 넘어 고리의 도시에 도착한 재의 귀인
고리의 도시에 도착한 재의 귀인은 도시가 생각보다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화톳불 근처에 있는 한 난쟁이는 이 고리의 도시가 '거짓된 모습'이라 했다. 또한 그는 도시 최심부에 잠들어 있는 왕녀의 안식을 깨워 거짓을 깨부수고 어두운 영혼을 손에 넣으라 일러주었다.
사실 고리의 도시는 장작의 왕 그윈이 어두운 영혼 <다크소울>을 발견한 아무도 모르는 난쟁이에게 하사한 도시였다. 오래전 그윈은 자신의 막내딸 필리아놀을 아무도 모르는 난쟁이에게 시집보냈고, 이후 필리아놀은 고리의 도시에서 어두운 영혼과 함께 안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귀인이 발을 디딘 도시 내부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겉보기엔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도시의 성직자들이나 고리의 기사들 모두 심연에 빠지거나 망자화되어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들은 재의 귀인을 보자마자 공격해왔다. 설상가상으로 퇴적지에서 흘러들어온 헤럴드 전사단과 용사냥꾼의 갑주까지 도시 하층의 심연으로 오염된 뭍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귀인이 간신히 뭍을 벗어나자 이번엔 어둠을 먹는 미디르란 고룡의 후손이 귀인의 앞을 막아섰다.
영겁의 시간을 거쳐 멸망의 시대까지 살아남은 순혈의 고룡, 미디르.
미디르는 과거 고룡 전쟁 이후 신들에 의해 거두어져 영원히 어둠을 먹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고룡이었다. 영겁의 시간 동안 어둠을 먹어와서인지 미디르는 기어이 심연과 어둠에 침식되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미디르는 왕녀의 안식을 지키기 위해 고리의 도시에서 파수꾼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귀인은 미디르가 심연에 완전히 타락하기 전에 안식을 주었다. 그리고 그 너머 도시 최심부 교회에서 난쟁이의 조언대로 왕녀의 안식을 깨우자 마침내 고리의 도시의 진실을 알게 된다. 사실 도시의 시간은 멈춰져 있었다. 지금까지 귀인이 본 도시의 모습은 모두 과거의 허상이었다.
과거 필리아놀은 그윈의 딸로서 어두운 영혼을 가진 난쟁이들을 감시하고 봉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에 필리아놀은 자신이 가진 마법의 알의 힘으로 고리의 도시 전체의 시간을 멈춰 도시 전체를 봉인했었다. 그 봉인을 풀어낸 재의 귀인은 도시의 모습이 몇 천 년은 흐른 듯이 바뀌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껏 재의 귀인이 도착해서부터 보아온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은 전부 과거의 모습일 뿐이었다. 제 시간을 찾은 도시의 모습은 너무도 달랐다. 그곳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이었다.
시간이 급격히 흐르며 폐허가 된 광활한 사막의 모습으로 바뀌어버린 고리의 도시
폐허 안에서 귀인은 말라비틀어진 왕녀의 시체 근처에서 망자 같은 몰골을 한 사람이 하반신을 뜯어먹힌 듯한 모습으로 살려달라며 왕녀의 침소 방향으로 처절히 기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어두운 영혼의 힘으로 긴 시간을 살아온 난쟁이 왕들은 귀인보다 먼저 온 누군가에게 학살당한 상태였다. 난쟁이 왕들은 그들의 근원인 어두운 영혼마저 빼앗긴 탓에 불사의 힘마저 깨지고 모두 죽어 있었다. 귀인이 주변을 좀 더 둘러보자, 말라비틀어진 난쟁이 왕들의 시체가 마구 내팽개쳐진 가운데 무언가를 뜯어먹던 한 기사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 기사는 귀인을 아직 살아남은 왕으로 착각하고는 뜯어먹던 왕을 귀인에게 집어던지며 덤벼왔다. 그 자는 다름 아닌 귀인이 찾고 있던 노예기사 게일이었다.
DLC <고리의 도시>의 최종보스 게일.
게일은 새로운 회화세계를 그리기 위한 물감으로 어두운 영혼의 '피'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게일이 다크소울을 찾아 고리의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난쟁이 왕들의 피는 이미 말라 있었다. 너무도 오랜 시간을 살아온 탓이었다. 난쟁이 왕들에게서 피를 취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게일은 화가에게 어두운 영혼의 피를 가져다주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난쟁이 왕들을 전부 죽여 그들의 영혼을 흡수했다. 그리하여 아직 마르지 않은 자신의 피를 어두운 영혼으로 물들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면 원하던 어두운 영혼의 피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물론 게일은 장작의 왕이나 불 꺼진 재조차도 아니었기에 자신이 어두운 영혼에 침식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재의 귀인이 그에게 도달했을 때에 그는 이미 이성을 잃어 귀인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지경이었다. 사실 그는 자신이 남겨둔 이정표를 따라 끝까지 따라온 누군가로 하여금 자신을 죽이고 자신의 피를 화가에게 가져가길 원했다.
귀인은 폭주하는 게일과 싸웠다. 도중 게일은 치열한 사투 끝에 흘린 자신의 피가 성공적으로 어둠에 물든 것을 보고 사명을 완수했음을 깨닫고는 만족해하며 완전히 자아를 잃은 망자로 전락한다. 하지만 어두운 영혼은 인간의 본질이기에 애초에 장작의 왕이 될 만큼 거대한 그릇과 자질을 갖추지 못한 게일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어두운 영혼에 휘둘려 미쳐가던 게일이 완전히 망자로 변하자 게일을 집어삼킨 어두운 영혼은 더는 저항할 의지를 다지지 못하는 망자가 된 게일의 몸뚱이를 매개체로 삼아 그 영향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옛날, 태초의 불로부터 왕의 소울을 얻어 벼락과 불 등의 힘을 다루며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거인들이 그러했듯, 망자가 된 게일의 몸뚱이에서 흘러나오던 어둠의 소울의 힘은 가히 신에 가닿는 초월적인 이적을 보이며 재의 귀인을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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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사투 끝에 재의 귀인은 게일을 가까스로 무찌르는 데에 성공했다. 게일은 마지막 순간에야 어두운 영혼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그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자신의 주인인 화가 소녀의 환상을 향해 손을 뻗으며 쓰러졌다.
죽은 게일로부터 어두운 영혼의 피를 회수한 재의 귀인은 게일이 바라던 대로 그것을 화가 소녀에게 가져다주었다. 다만 귀인은 게일의 최후를 소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소녀는 그저 안료를 가져와 준 귀인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며 자신이 그릴 새로운 회화세계에 재의 귀인의 이름을 붙이고는 언젠가 게일이 다시 돌아올 때 그가 편안히 머무를 수 있을 새로운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
"저는 당신의 이름으로 세계를 그리겠어요. 춥고, 어둡고, 굉장히 상냥한 그림. 분명 언젠가, 누구의 있을 곳이 되어줄 수 있을만한 그림을."
최초의 난쟁이가 최초의 불꽃에서 찾아냈던 어둠 '다크 소울'은 인간의 본질을 상징한다. 반면 '불'은 그윈에 의해 어둠을 봉인하고 만들어진 이성을 상징한다. 화가 소녀는 앞으로 불과 다크 소울, 이 두 가지를 이용해 어둡지만 상냥한 새로운 인간의 세계를 그릴 것이다. 현재의 세상이 어떤 종극을 맞을지라도.
<完>